베토벤과 같은 자유롭고 개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동시대의 조선에서 태어났다면, 엄격한 신분제 속에서 그의 운명은 비극으로 끝났을 가능성이 큽니다. 예를 들어, 베토벤이 실제로 했던 일 중 하나는 공작 리히노프스키에게 쓴 유명한 편지입니다. 그는 공작의 저택을 떠나며 “이 세상에 당신 같은 귀족은 수없이 많지만 베토벤은 오직 나 한 사람 뿐이오!”라고 당당히 썼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유럽의 사회에서 귀족 제도를 비판하는 개인주의적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을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에서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다면, 베토벤의 이러한 발언은 결코 용납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선은 신분제가 엄격하게 유지되었고, 특히 권력자나 양반층을 비판하는 행동은 반역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정여립은 조선 시대에 “모든 사람이 신분 상승이 가능하다”는 혁명적인 글을 쓴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사상은 당시 사회를 뒤흔들었고, 결국 모반 혐의로 기축옥사라는 대대적인 숙청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정여립과 관련된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처형되었고, 그의 가족은 물론, 9족까지 몰살당하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또 다른 예로, 리진이라는 인물의 비극입니다. 1905년 파리에서 출간된 ‘En Coree'(한국에서)라는 책 속에 등장하는데, 책속에서는 Un jeune chargé d’affaires (il vit encore et je ne puis divulguer son nom)
‘한 젊은 대리공사(그가 살아 있기 때문에 나는 그의 이름을 공개할 수 없다.)’
‘mon collègue et ami’
‘나의 동료이자 친구’
라고 했지만, 대리 공사의 이름은 프랑뎅 이었고, 조선의 궁궐 무희 리진에게 매혹되어 파리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나 향수병에 조국 조선을 그리워하던 리진을 달래주려 다음번 부임때에 다시 조선에 같이 갔지만, 그녀의 신문은 관기였기에, 정식 부인이 아니었던 신분이라 어쩔 수 없이 다시 조선의 관기로 끌려 가게 되었고, 그녀는 신분이 전락하자 금조각을 삼켜 자살했습니다. 이 비극적 사건은 조선 사회에서 신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리진은 귀국한 후 신분이 추락하면서,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고,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에서 베토벤이 조선에 태어났다면, 그의 자유로운 사고와 예술가로서의 자존감은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신분제에 도전하는 발언은 모반으로 간주되어, 그의 생명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도 처참한 비극을 겪었을 가능성이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