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중요한 역활을 한 사람으로 우리는 유성룡과 함께 이원익을 빼 놓을 수 없다. 특히 이원익은 계속되는 국난속에서 모든 위기 극복의 중추였던 분이셨다. 그는 거문고를 즐겨 탓다.

그를 위해 지은 관감당 안에는 지금도 그가 올라가 거문고를 탔다는 탄금암(彈琴岩)이라는 바위가보존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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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익 선생의 문집인 <오리집> 에도 선생이 서울 동숭동 인근에 사실 때 자주 낙산에 올라 거문고 연주를 즐기셨다고 하며 , 또한 이원익의 5대손 이인복의 문집에도 <문충공유금내력전말기>라는 글이 있어 선생이 거문고를 좋아하셨음을 알려준다.

이원익의 공무 생활기간은 평안한 기간이 아니었다. 64년이라는 긴 공무 생활 중 그는 임진왜란-정유재란-정묘호란의 조선 역사 최대의 수난기를 거쳤었다.

여유롭고 편안하게 음악을 연주할 시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 국난극복과 음악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의문을 품게 되었다.

전쟁통 바쁘고 처절한 상황속에서 음악이라니…

무신인 이순신같은 장군은 모든 고난속에서 국난을 극복하는데 문신이라서 음악이나 뜅기고 있었나?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진정 고독하고 치열한 임진왜란 전쟁기록인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를 보자.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일기가 나온다.

“아침에 새로 만든 가야금에 줄을 맸다.”

“저녁에 피리를 불고 노래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밤이 깊은데 해(海)의 피리 소리와 영수의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들으면서 우수사와 조용히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달빛이 비단결처럼 고와 바람도 파도를 일으키지 못했다. 해를 시켜 피리를 불게 했는데 밤이 깊어서야 그쳤다.”

“여러 장수들과 함께 가야금 몇 곡조를 들었다.”

 

이순신도 이 험난한 시기에 음악을 듣고 스스로 악기를 연주 했다는 ‘난중일기’의 기록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음악은 뜅가 뜅가 오락만은 아닐것이다.

치열하고 고독한 결단의 와중에 그들은 음악을 통해 결단을 내린것이다.

음악은 고통의 치유 뿐 아니라 우리 마음과 정신의 문제를 푸는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의 아들의 기록에도 보면 아인슈타인이 혼자 바이올린으로 즉흥적 멜로디를 키면서 생각하다가 문제를 풀었다고 탄성을 했다라고 한다.

음악을 하면 악기가 혼자 놀기 때문에 뇌의 다른 부분에서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바이올린을 활을 잡는것은 활을 쏘는 것과 같다. 다만 활을 쏠때 도레미파 음악만을 생각하지 않는다.

관련 모든 인생이 연주 중에 다 들어간다.

어느 순간 왼손과 오른손은 신경 쓰지 않아도 자동으로 움직이고,  그러면서 자동으로 또한 언어가 풀지 못했던 문제를 음악이라는 언어가 풀어주기 때문이다.

즉 활을 쏘는 것 같은 집중 속에 오히려 다른 생각을 또 다시 깊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뇌가 두개로 나눠지면서 자동으로 그 음악의 시간만큼 초몰입의 사고가 이루어지는것이다.

한쪽은 악기 연주로 뇌가 몰입되면서, 자동으로 다른 문제에 대한 생각이 악기 연주 만큼의 몰입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처음에는 자신의 문제가 뇌의 두 쪽 중 어느 한 부분에 있을려고 저항한다. 자신의 사고 수준을

기존 크기로 제한하려는 뇌의 자연스러운 저항이다.

그러다가 그 경계를 벗어나 두 경계에서 버티는 중 엄청난 사고의 결과가 나오게 된다.

그래서 고민이 있을때는 악기를 연주 하거나 음악을 듣는 등 몰입해 버리면 자동으로 생각이 풀려지기 때문에 혼자 책상에 앉거나 산책하는 중의 생각 보다 더 깊은 수준의 생각이 된다.

시각, 촉각 , 미각 보다 귀로 듣는 음악이라는 것이 가장 상상력을 개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원익, 이순신 장군의 국난극복의 비결중에는 악기를 했다는 것이 분명 비밀중 하나라는 결론이다.

einstein